2007년 01월 05일
준비와 질문
준비와 질문
어제 정태인 선배를 봤다. 우연히는 아니다. 몇 주 전부터 약속을 했던 상황인데, 늘 내가 그렇듯이 7시에 약속을 했지만 중간에 TV에 잠깐 나갈 일이 생겨서 9시나 되어서야 봤다. 그 자리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유명하다고 치면... 다들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정태인 선배를 봤다는 사실이 조금은 중요한 자리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양반이 나한테 할 얘기가 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무슨 얘기를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 그 상태에서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하여간 삶은 늘 그렇게 마음 먹은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나는 정태인 선배를 안지 20년 가까이 된다. 하늘 같은 선배이고, 한사연을 만든 사람이고, 또 말을 만들자면 박현채 선생의 직계이다. 박현채 선생이 정태인 선배말고 직계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경제평론가’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박현채 선생이다. ‘무직’이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만든 말로 알고 있다. 그가 쓴 대부분의 글들을 ‘잡글’이라고 부른 것도 박현채 선생다운 일이다. 이 경제평론가라는 말을 받아 쓴 사람은 정운영 선생이다. 그도 오랫동안 무직이었다. 정운영 선생은 딱 한 번 뵌 적이 있다. 지금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으셨을 때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옛날 한겨레 신문사에서 뵈었다. 박현채 선생의 인생에 대해서 안 되었다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정운영 선생을 생각하면 안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생각을 같이 하게 된다. 미안하지만 그게 내 본 심정이다.
정태인 선배는 그 시절을 휩쓸던 선배이고, 내 나이 때 한사경의 연구조직을 만들었다. 사실 사람들은 정태인의 40대 초반을 몰라서 그렇지 박현채 선생의 직계제자이던 정태인의 10년 전은 정말 화려했다. 오죽 했으면 18세 빨치산이던 그 박현채 선생이 끼고돌았을까...
그 정태인 선배가 청와대에 왜 들어갔는지 난 잘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이유는 모르지만 유시민과 친구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었나? 아니면 이정우 선생 때문이었을까?
내가 실물로 정태인 선배를 처음 본 것은 참여정부 시절에 청와대에서 봤다. 예전에는 청와대에 자주 갔었는데, 노무현 시절에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가지는 않았다. 주로 그 앞에서 밥먹는 일을 많이 했다... 그래도 진짜 맘 먹고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테이블에 올라왔던 것은 새만금 때문이었고, 3보일배 일행이 서울에 가깝게 와있던 시절이었다. 나나, 정태인 선배나 모두 배석하는 신분이었고, 그날은 이정우 선생과 당시 환경운동연합 총장이던 서주운 선배 사이에 담판을 짓던 자리였다. 얘기는 잘 안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정태인 선배는 ‘령’만 내려주면 작업을 해보겠다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이정우 선배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만약 그 날의 그 순간의 기억이 없었다면 2004년 아니면 2005년 나와 정태인 선배가 대판 싸울 날이 있었을 것 같지만, 새만금을 위해서 정태인 선배가 얼마나 창피를 무릎쓰고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에...
그 뒤로도 몇 번 좋은 일과 언성이 오고갈 뻔한 일이 있었다. 아직도 왜 정태인 선배가 그렇게 클러스터에 대해서 집착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건 시간이 더 지나가면 논쟁할 일이지만, ‘클러스터 정태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나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내가 정태인 선배에 대해서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사건이 먼저 생겼고, 정태인 선배는 청와대를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한미 FTA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미 FTA는 나에게도 그렇지만 정태인 선배에게도 뒤통수를 맞은 사건 같은 것이다. 그 정도로 상황이 전개될지는 나도, 정태인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6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도 정태인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미 FTA라는 사건을 맞았고, 소위 경제학을 전공한다고 하면서 아직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좀 가혹한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은 한다고 했지만, 방어선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건 아니야“라는 소리만 되뇌이면서 1년을 보낸 셈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정태인 선배가 나에게 물어볼 질문은 뻔하다. “어떻게 하자는 건데.”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전체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물론 녹색당이나 녹색정치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간추린 답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질문하면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대답할 말이 별로 없다. 작은 범위의 깊은 얘기에 대해서 조금 준비되어 있는데, 한미 FTA 이후의 논의는 넓은 범위에 대해서 깊은 얘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정태인 선배를 봤던 것은 지난 여름 여의도에서 심상정 의원과 같이 보았을 때의 일인데, 꼭 봐야 한다고 하면서 물어볼 질문은 너무 뻔해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물론 나도 대안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나름대로 모델링도 하고 있지만, 전체에 대해서 물어보면 범위가 너무 커서 답할 수가 없다.
그런 정태인 선배가 나한테 한 마디 질문을 했다. “언젠가 바꿀 수 있을 상황이 되면 뭘 바꿀 건데?”... 뭐라고 질문을 하기는 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너무 묘한 질문을 받은 셈이다.
글쎄... 이건 어려운 종류의 질문이다. 크게 보면 내가 원하는 세상에 관하는 이야기이고, 작게 보면 만약 한미 FTA 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끌고가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인 셈이다. 만약 내가 잘못 이해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첫 번째 종류의 질문이라면 철학에 관한 대답을 하는 것이 맞고, 두 번째 종류의 질문이었다면 ‘대안’에 관한 질문이다. 철학은 하고 싶은 말 아무거나 하고 우기면 되는데, 만약 대안에 대한 질문이라고 그렇게 답변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난 이 대안에 대해서 답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 정말 그래서 아무 말도 안했다.
대답하는 대신, 노래방에 가서 다들 한 시간 동안 소리만 지르다 집에 왔다.
침묵보다 슬픈 고함이었다. 준비와 질문이라는 평범한 단어가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르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 by | 2007/01/05 06:36 | 그냥 잡담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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