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8월 01일
대학교 신문사와 교지는 뭐가 다를까?
나는 대학생과 20대에 더 많은 발언기회와 공식 데뷔의 창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회의 구조가 '지체된 데뷔'라는 것을 아주 특징적으로 만들어내고,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퇴행의 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많은 출판사의 에디터들은... 그들도 한 때는 대부분 문학도였거나 예민한 분석가들이었는데, 자신들의 글이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웠던, 그리고 날카로웠던 시기를 25세를 전후한 시기라고 회상한다. 사실 가장 예민하고 불안하면서도 섬세한 글은 그 나이 때 나오고, 내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서른을 넘어가면, 이미 쓴 맛을 한두 번씩 보면서 이미 한 번 무뎌진 상태이다.
꽤 큰 출판사의 에디터들이 예전에 쓴 내 글을 보고 20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서 약간 노력을 했다고 하면서 나에게 전해준 말들 중의 일부는 새겨들을 만하다. 게시판의 글과 같이 작은 글들을 보고 실제로 만나서 책 한 권의 집필을 부탁하면, 대부분 책 한 권을 써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건 현실적인 지적인데, 아마 글을 쓰고 싶어하는 20대들이 좀 생각해볼만한 구석이 있을 것 같다.
하여간... 어쨌든 20대에게 더 많은 발언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 창구로 생각해낸 대안이 대학교 신문사와 교지의 편집국장이나 기자들이다. 예를 들면 최장집에 대한 비판을 한다고 할 때, 여기에 패널을 두 사람을 붙이는데, 그 중에 한 명을 이런 사람들로 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위적인 시도이기는 한데, 과연 최장집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불만을 비록 날 것이라도 가지고 있을 20대가 있을까?
비슷한 시도를 몇 번 해본 적이 있기는 한데, 지금까지는 결과는 좋지 않았다. 40대는 아예 그런 비판의 자리에 나서지 않고, 30대는 취직자리, 진로 이런 거랑 엉켜있어서, 특히 학위 마지막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과 달리 사회적 발언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해는 가는게... 괜히 학위도 받기 전에 비판의 예봉을 펼쳤다가 진짜 학위도 못 받고 인생 곤란하게 된 사람이 여러 명 있다.
그렇다면 20대는? 내가 경험해본 아주 작은 사례로는... 이런 자리를 마련하면, 선생님, 존경합니다, 사랑해요...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다시 검증된 사람들로 논쟁구도를 만드는데, 장기적으로는 그 나물에 그 밥인, 익히 우리가 봤던 잡탕국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한국 사회와 들레쥬... 이런 토론회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토론회는 하나마나이다. 사랑해요, 들레쥬, 존경해요, 들레쥬, 누굴 어떻게 불러놓고, 어떻게 주제를 구성해도 거의 100% 논쟁 결과는 이렇게 나올 확률이 높다. 기껏 불꽃튀게 붙는다고 하면, 누가 책을 더 많이 봤는지, 더 여러 번 봤는지... 결론은 "내가 들레쥬 더 잘 알아", 이런 토론회가 된다. 이런 건 하나마나이다.
하여간 이런 그 나물에 그 밥을 피하기 위해서 대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데까지는 합의를 봤는데, 실제로 지금의 대학생들과 가장 최근까지 토론을 하고 있는 분들이...
신문사 편집국장이면 가능성이 있고, 교지는 안된다고 하신다.
내 기억에는 예전의 대학 신문은 기사 만들어내서 분량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진짜로 길게 숨을 가지고 기획하는 것들은 교지에서 주로 했는데, 지난 20년 동안 무슨 일이 이 안에서 벌어진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예전에 서강대 교지부에 아주 친한 친구가 있어서, 지리산의 빨치산에 관한 기획기사 만들고 그런 일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영자 신문에 기자로 활동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시절까지의 친구가 삼성 X-파일로 유명해진 MBC의 이상호 기자였는데, 솔직히 그 시절에는 대학 교지가 신문보다는 좀 깊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영매 얘기로 지율스님의 책에도 실렸던 내 글이 원래는 어느 지방대학교 교지에서 부탁받아서 썼던 글인데... 생각해보니까 난 대학교 교지나 대학원 신문 같은 데에 기고를 많이 한 편이다 (이런 데는 원고료 없어도 영광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런데 하여간 교지와 신문사 사이에 뭔가 차이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지금 그 차이를 지적하는 것인데, 작동 메카니즘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사실 자치라는 가슴 뛰는 단어의 한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이 대학교나 대학원 신문이고, 교지이기는 하다. 이런게 좋아져야 길게 보면 이 땅에 희망이 생길 것이기는 하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와 이런 것들이 좋아지려면 뭘 해야하는가, 이 두 가지의 질문이 오늘의 고민거리다.
많은 출판사의 에디터들은... 그들도 한 때는 대부분 문학도였거나 예민한 분석가들이었는데, 자신들의 글이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웠던, 그리고 날카로웠던 시기를 25세를 전후한 시기라고 회상한다. 사실 가장 예민하고 불안하면서도 섬세한 글은 그 나이 때 나오고, 내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서른을 넘어가면, 이미 쓴 맛을 한두 번씩 보면서 이미 한 번 무뎌진 상태이다.
꽤 큰 출판사의 에디터들이 예전에 쓴 내 글을 보고 20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서 약간 노력을 했다고 하면서 나에게 전해준 말들 중의 일부는 새겨들을 만하다. 게시판의 글과 같이 작은 글들을 보고 실제로 만나서 책 한 권의 집필을 부탁하면, 대부분 책 한 권을 써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건 현실적인 지적인데, 아마 글을 쓰고 싶어하는 20대들이 좀 생각해볼만한 구석이 있을 것 같다.
하여간... 어쨌든 20대에게 더 많은 발언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 창구로 생각해낸 대안이 대학교 신문사와 교지의 편집국장이나 기자들이다. 예를 들면 최장집에 대한 비판을 한다고 할 때, 여기에 패널을 두 사람을 붙이는데, 그 중에 한 명을 이런 사람들로 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위적인 시도이기는 한데, 과연 최장집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불만을 비록 날 것이라도 가지고 있을 20대가 있을까?
비슷한 시도를 몇 번 해본 적이 있기는 한데, 지금까지는 결과는 좋지 않았다. 40대는 아예 그런 비판의 자리에 나서지 않고, 30대는 취직자리, 진로 이런 거랑 엉켜있어서, 특히 학위 마지막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과 달리 사회적 발언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해는 가는게... 괜히 학위도 받기 전에 비판의 예봉을 펼쳤다가 진짜 학위도 못 받고 인생 곤란하게 된 사람이 여러 명 있다.
그렇다면 20대는? 내가 경험해본 아주 작은 사례로는... 이런 자리를 마련하면, 선생님, 존경합니다, 사랑해요...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다시 검증된 사람들로 논쟁구도를 만드는데, 장기적으로는 그 나물에 그 밥인, 익히 우리가 봤던 잡탕국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한국 사회와 들레쥬... 이런 토론회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토론회는 하나마나이다. 사랑해요, 들레쥬, 존경해요, 들레쥬, 누굴 어떻게 불러놓고, 어떻게 주제를 구성해도 거의 100% 논쟁 결과는 이렇게 나올 확률이 높다. 기껏 불꽃튀게 붙는다고 하면, 누가 책을 더 많이 봤는지, 더 여러 번 봤는지... 결론은 "내가 들레쥬 더 잘 알아", 이런 토론회가 된다. 이런 건 하나마나이다.
하여간 이런 그 나물에 그 밥을 피하기 위해서 대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데까지는 합의를 봤는데, 실제로 지금의 대학생들과 가장 최근까지 토론을 하고 있는 분들이...
신문사 편집국장이면 가능성이 있고, 교지는 안된다고 하신다.
내 기억에는 예전의 대학 신문은 기사 만들어내서 분량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진짜로 길게 숨을 가지고 기획하는 것들은 교지에서 주로 했는데, 지난 20년 동안 무슨 일이 이 안에서 벌어진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예전에 서강대 교지부에 아주 친한 친구가 있어서, 지리산의 빨치산에 관한 기획기사 만들고 그런 일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영자 신문에 기자로 활동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시절까지의 친구가 삼성 X-파일로 유명해진 MBC의 이상호 기자였는데, 솔직히 그 시절에는 대학 교지가 신문보다는 좀 깊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영매 얘기로 지율스님의 책에도 실렸던 내 글이 원래는 어느 지방대학교 교지에서 부탁받아서 썼던 글인데... 생각해보니까 난 대학교 교지나 대학원 신문 같은 데에 기고를 많이 한 편이다 (이런 데는 원고료 없어도 영광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런데 하여간 교지와 신문사 사이에 뭔가 차이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지금 그 차이를 지적하는 것인데, 작동 메카니즘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사실 자치라는 가슴 뛰는 단어의 한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이 대학교나 대학원 신문이고, 교지이기는 하다. 이런게 좋아져야 길게 보면 이 땅에 희망이 생길 것이기는 하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와 이런 것들이 좋아지려면 뭘 해야하는가, 이 두 가지의 질문이 오늘의 고민거리다.
# by | 2007/08/01 13:23 | 그냥 잡담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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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혜정 교수 및 그 추종자들과 활동범위가 겹쳐서 발표나 객석 토론으로 반대의견을 많이 발표했는데 나중에는 좀 싫어하더라구요.
문화연대 이xx 교수랑도 종종 마주쳤는데 제가 하도 꼬치꼬치 따지니까 좀 싫어하는 듯 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게,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던 '청소년학과 출신들을 지역 청소년회관에 의무적으로 배치하는 법안'(지금도 그때 문화연대가 왜 이런 법안에 찬성을 했는지 의아하긴 합니다.)에 대한 공청회였는데 제가 겁이 없던 때라 "그거 특정 학과의 밥그릇 챙기기 아니냐. 청소년 활동이 특정 직군에 독점되면 자율성은 침해된다."라고 비판했었죠.
저야 운동진영 안에서 성장할 생각이 없어서 저렇게 과감하게 내질렀지만, 졸업하고 운동진영에서 간사라도 하거나 유명 학자 밑에서 학위라도 따려면 여기저기 눈치 볼게 많겠죠.
운동하려던 친구들이 단체 간사,대학원으로 밖에 진출 못하는 현실에서는 명망있는 교수들에게 함부로 말을 못합니다. 그들도 인간인지라 자신들을 비판하는 20대들을 이뻐하진 않거든요.
80년대 학번들이야 전혀 새로운 학문을 했기에 전세대의 학자들을 마음껏 비판하고 새로운 권위자가 되었지만, 90년대 이후 학번들은 80년대 학번들의 권위에 굴종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안착되었죠. 궁극적으로는 내용만 바꾸고 권력관계를 전복시키지 못한 채 새로운 권위가 되어버린 386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명원씨 생각나네여. 지금은 그래도 잘 풀리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