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7월 31일
Royal Charter에 대한 번역은?
한겨레 신문에 3주에 한 번 칼럼을 쓰는데, 예전 명랑국토부 시절의 2주 주기 보다는 조금 편해졌다. 2주가 있으면, 2주를 준비하게 되고, 3주가 있으면 3주를 준비하게 된다.
보통 칼럼을 쓰게 되면 세 개 정도의 주제를 준비해서 압축을 시작하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두 개 중에서 하나를 들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하나는 버리게 된다. 물론 준비한게 아까워서 버린다고 하면서도 이건 더 준비해서 다음 번에 쓰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막상 그렇게 둘 중에 하나가 남았던 것이 다시 칼럼이라는 형식으로 신문에 나가게 된 적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다른 사건이 생기면 3주 전에 생각했던 것들은 이미 요단강 너머로 가버린 내용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칼럼을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두개 혹은 세 개 정도의 논문 거리를 준비해서, 별도로 전개하면 2~3개의 논문이 되었을 내용을 하나로 압축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일단 내가 글을 잘 못쓴다는 사실을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역사에 남는 명문, 혹은 몇 줄로도 감동시키는 좋은 글, 하고는 싶은데, 이건 내 능력상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글만 잘 쓸 수 있다면야 논문거리가 아니라 삶의 작은 소사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나같이 너절하게 글 쓰는 사람이 택도 없이 명문장 흉내냈다가는, 그야말로 어떤 꼴불견이 나오게 될지는 너무 뻔한 일이다.
두번째 이유는, 내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잔챙이라는 점을 역시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뭔가 내용이라도 들어가 있어야 한 번이라도 읽을만한 글이 되지, 내용도 없다면 그 글에 시선이 머물렀던 사람에게 민망하게 될 것 같다.
이런 이유들로, 결국 2배, 2배가 안되면 3배, 이런 물량공세를 사용하게 된다. 원고지 여덟장 분량에 논문 두개 혹은 세개의 내용을 담으면, 중간에 중대한 논지 전환이 한 번 혹은 두 번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설명할 여유가 별로 없기는 하다. 그러나 분량이 늘어난다고 해서 내 경우에는 내용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요번에 쓰는 글에는 두 개의 주제가 각축 중인데, 하나는 KBS 시청료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어 시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마 공영방송과 시청료에 관해서 쓸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건 커버에 관한 이야기이고, 2차 텍스트는 부동산 투기에 대한 사회적 자세인데, 이 글을 통해서 정말로 내가 의도하는 바는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가 같이 동의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공영방송의 시청료 얘기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목표지만, 속내로 보면 "그래도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은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커버 레터에 해당하는 셈이다.
나의 이런 글쓰는 습관은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보통은 세 개의 레이어라는 아키텍처를 갖는 형태를 나는 좋아하고 선호하는 편이다. 기승전결, 혹은 서론 본론 결론, 이런 구조에 의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서술 방법을 중심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내 글도 가끔은 이렇게 3단 구조, 혹은 4단 구조를 갖기도 하지만, 보통은 글 내부의 세 개의 레이어를 짜는데 더 시간을 많이 들이고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런 습관이 아마 프랑스에서 대학원 시절에 무수히 써내려갔던 시험답안과 그 시절의 프랑스식 글쓰기 과정에서 생겨난 습관이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해보기도 한다. 보통 대학원 이상의 프랑스 답안은 A4보다 조금 더 큰 백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15점 이상을 받고 싶다면 이걸 앞뒤로 빼곡이 3장에서 4장 정도는 적어내려가야 한다. 시간은 3시간을 주는데, 경우에 따라서 4시간을 주기도 한다. 문제는 두 문제 중에서 택일이다.
이 시험의 첫번째 레이어는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직문직답식인데, 워낙 질문이 광범위해서 이것들을 정확히 A4 앞뒤로 적으면 딱 10점을 맞게 된다. 물론 주어진 시간 내에 서술하다 보면 틀리는 내용이나 평소에 잘못 알고 있던 내용들도 들어가고, 알았는데 서술과정에서 예를 들면, 불어 작문의 실수에 의해서 거꾸로 적게 되던가 - ne 같은 걸 강조한다고 잘못 사용하거나 가정법의 시제가 몇 글자 차이로 틀리면 내용이 반대가 되어버린다 - 하면 9점 밑으로 내려가고, 여기에서 1점만 더 내려가면 과락기준에서 달랑달랑하게 된다.
두 번째 레이어는 출제자에 의도에 대해서 과하지 않도록 적절히 반박하는 걸 깔아야 한다. 내가 당신 이 문제 왜 냈는지 아는데, 그러니 여태 당신이 이 모양이지... 혹은 10년 전에 이런 식의 문제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이런 문제나 내고 있느냐... 이건 기술적으로 세밀하고, 예의가 필요한 작업이다. 만약 택도 아닌 방식으로 출제자의 의도를 공격했다면, 이젠 8점이 아니라 0점도 각오해야 한다. 기술적인 시험이었는데, 이걸 잘못 처리해서 4점을 받고 결국 재시험을 보게 된 경우가 있었다. 이 때내가 주로 했던 주의사항은 첫번째 레이어에서 기술적으로 출제자의 의도에 대한 공격이 연결되도록 논리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분량이 과하면 안되고, 또 절대로 출제자가 자신을 직접 공격한다고 느끼도록 하면 안된다. 어쨌든... 채점자는 출제자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도전적인 자세인데, 이 두번째 레이어를 통해서 문제는 물론 내가 쓴 답이 과연 학계에서 어떤 자리에서 어떤 흐름에 있다는 것인지를 내가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프랑스에서 대학원 이상의 시험에서는 단순하게 기술적인 지식을 묻는 것만은 아니고, 기술을 전수하는 마에스트로와 전수받는 사람 사이의 일종의 대화에 가깝다. 이 두 번째 레이어는 첫 번째 레이어의 중간중간에 아주 가볍게 감춰둬야 하지만, 물론 아무리 감춰도 전공자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안다. 결국 자기 욕인데, 숨겨놓았다고 그게 숨겨지겠는가. 애교로 도망갈 수는 없고, 만약 정확하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이 질문을 할 수 없다면 두 번째 레이어는 포기하고, 그냥 10점을 기대하는 것이 좋다. ENSEE에서 봤던 시험에서 워낙 문제가 어려워서 아예 이 두 번째 레이어는 포기하고, 그냥 첫 번째 레이어만 가지고 답을 쓴 적이 있다. 운이 좋게 12점이 나왔는데, 그 과목에서 매우 화려한 등수를 얻었던 적이 있다.
세 번째 레이어는 아주 어렵다. 왜 내가 지금 시험을 보고 있느냐, 그리고 왜 당신은 이 문제를 내고 있고, 우리는 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지금 한 학기 동안 수업 혹은 세미나라는 공간에서 마주보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 세상을 살고 싶다... 이런 학자로서의 결심 혹은 앞으로 연구하고 싶은 분야 같은 것을 문제의 행간에 대한 약간의 비판들과 함께 살짝 밀어넣는 것이 15점을 넘어가는 기록적인 점수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세 번째 레이어이다.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것까지는 필요가 없지만, 내가 쓴 불어에는 수많은 철자오류와 문법오류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불어로 쓰니까 이렇지라고 - 사실 우리말로 써도 오히려 그 이상의 오탈자와 문법오류가 나온다 - , 하여간 뭔가가 더 필요하다. 한문장, 길면 두 문장 같은 것들을 예를 들면 장-밥티스트 세이의 업적에 평가하면서, 가정법 혹은 조건문 같은 것을 동원하고, 주어도 'on'과 같은 비지칭 주어를 사용하거나 수동형 같은 것을 활용해서 살짝 끼워넣던 것이 내가 주로 쓰던 수법이다. 선생을 단순히 감동시키는 것만으로는 15점을 넘어서거나 혹은 이 오류 투성이의 불어문서를 과락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하고, 같이 연구하는 동료라는 생각에서 약간의 뭔가가 더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몇 번 17점과 18점을 넘긴 적이 있었는데, 내가 15점을 넘겼던 모든 시험들은 예외없이 이렇게 세 개의 레이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답안을 쓰고 나면 학기가 끝나고도 나중에 선생이 따로 부르거나 혹은 곤경한 일이 처했을 때에 자상하게 도움을 받게 된다... 나도 몇 번 그 시절의 답안지 덕분에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고, 대학원 입학할 때까지의 고생과는 달리 마지막 학위를 내는 순간까지 정말이지 편하게 지냈고, 약간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 지냈다.
그 시절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인지, 대체적으로 세 개의 레이어로 글을 구성하려는 경향이 나에게는 있다. 그래서 내가 혼자 보면서 흐믓해 하는 몇 개의 글들은 이렇게 세 개의 레이어를 구성하는데 성공한 글이다.
나중에는 정주영 회장한테 올라가는 보고서나 총리한테 가는 보고서도 이렇게 세 개의 레이어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 때때로 잘 썼다는 소리를 듣고, 때때로 도대체 그 말은 왜 넣었냐고 드럽게 터지기도 하고... 세상은 학기말고사와 같은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이 전략은 한국에서 그렇게 유효하지는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내 판단이다. 일단 우리말이 불어와 같이 은근한 조건법이나 부대상황 같은 것들을 숨겨서 표현하는데 그렇게 간단치가 않고 - 그렇다고 내가 우리말보다 불어를 더 잘한다는 것은 아니다 - 또 수동형 같은 것으로 교묘하게 능동과 수동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우리 말 표현에서는 어쩐지 어색하다.
쓸데없는 얘기가 괜히 길어졌다. BBC에는 Royal Charter라는 것이 있다. NHK는 공영방송으로 왜 좋은 방송이 되었는지는 2주 동안 좀 들여다봤는데 아직도 전혀 이해를 못했고, BBC의 경우는 Royal Charter라는 존재와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점에서는 약간의 프레임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Royal Charter를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방송국이 여왕과 한 약속인 셈인데, 왕립, 고귀, 황제 - 이러다 황송까지 나오겠다 - 그 어떤 수식어도 이 맥락에서는 잘 안 맞는 것 같고, Charter도 늘상 하듯이 장전이라고 해서는 뚯이 안통할 것 같다. 황실 장전? 무슨 AK 탄창튀어나오는 소리 같다. <경제 비타민> 같은 것 좀 하지 말라는 한 문장을 원고지 여덟장으로 늘리는 일이 막상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데, 정말로 이걸 사라지게 하는 사회적 행위 혹은 유사한 사건이 벌어질수 있도록 주어진 원고지 여덟장에 말하는 방법은? 그냥 안 없애면 총들고 쳐들어간다는 단 하나의 문장이 복잡하지 않고, 간결해서 좋은데, 이런 문장은 우아하지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원고지 여덟장을 어쩌면 그렇게 우아하게 잘 메꾸는지, 이럴 때는 부럽기도 하다.
보통 칼럼을 쓰게 되면 세 개 정도의 주제를 준비해서 압축을 시작하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두 개 중에서 하나를 들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하나는 버리게 된다. 물론 준비한게 아까워서 버린다고 하면서도 이건 더 준비해서 다음 번에 쓰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막상 그렇게 둘 중에 하나가 남았던 것이 다시 칼럼이라는 형식으로 신문에 나가게 된 적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다른 사건이 생기면 3주 전에 생각했던 것들은 이미 요단강 너머로 가버린 내용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칼럼을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두개 혹은 세 개 정도의 논문 거리를 준비해서, 별도로 전개하면 2~3개의 논문이 되었을 내용을 하나로 압축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일단 내가 글을 잘 못쓴다는 사실을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역사에 남는 명문, 혹은 몇 줄로도 감동시키는 좋은 글, 하고는 싶은데, 이건 내 능력상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글만 잘 쓸 수 있다면야 논문거리가 아니라 삶의 작은 소사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나같이 너절하게 글 쓰는 사람이 택도 없이 명문장 흉내냈다가는, 그야말로 어떤 꼴불견이 나오게 될지는 너무 뻔한 일이다.
두번째 이유는, 내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잔챙이라는 점을 역시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뭔가 내용이라도 들어가 있어야 한 번이라도 읽을만한 글이 되지, 내용도 없다면 그 글에 시선이 머물렀던 사람에게 민망하게 될 것 같다.
이런 이유들로, 결국 2배, 2배가 안되면 3배, 이런 물량공세를 사용하게 된다. 원고지 여덟장 분량에 논문 두개 혹은 세개의 내용을 담으면, 중간에 중대한 논지 전환이 한 번 혹은 두 번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설명할 여유가 별로 없기는 하다. 그러나 분량이 늘어난다고 해서 내 경우에는 내용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요번에 쓰는 글에는 두 개의 주제가 각축 중인데, 하나는 KBS 시청료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어 시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마 공영방송과 시청료에 관해서 쓸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건 커버에 관한 이야기이고, 2차 텍스트는 부동산 투기에 대한 사회적 자세인데, 이 글을 통해서 정말로 내가 의도하는 바는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가 같이 동의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공영방송의 시청료 얘기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목표지만, 속내로 보면 "그래도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은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커버 레터에 해당하는 셈이다.
나의 이런 글쓰는 습관은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보통은 세 개의 레이어라는 아키텍처를 갖는 형태를 나는 좋아하고 선호하는 편이다. 기승전결, 혹은 서론 본론 결론, 이런 구조에 의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서술 방법을 중심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내 글도 가끔은 이렇게 3단 구조, 혹은 4단 구조를 갖기도 하지만, 보통은 글 내부의 세 개의 레이어를 짜는데 더 시간을 많이 들이고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런 습관이 아마 프랑스에서 대학원 시절에 무수히 써내려갔던 시험답안과 그 시절의 프랑스식 글쓰기 과정에서 생겨난 습관이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해보기도 한다. 보통 대학원 이상의 프랑스 답안은 A4보다 조금 더 큰 백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15점 이상을 받고 싶다면 이걸 앞뒤로 빼곡이 3장에서 4장 정도는 적어내려가야 한다. 시간은 3시간을 주는데, 경우에 따라서 4시간을 주기도 한다. 문제는 두 문제 중에서 택일이다.
이 시험의 첫번째 레이어는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직문직답식인데, 워낙 질문이 광범위해서 이것들을 정확히 A4 앞뒤로 적으면 딱 10점을 맞게 된다. 물론 주어진 시간 내에 서술하다 보면 틀리는 내용이나 평소에 잘못 알고 있던 내용들도 들어가고, 알았는데 서술과정에서 예를 들면, 불어 작문의 실수에 의해서 거꾸로 적게 되던가 - ne 같은 걸 강조한다고 잘못 사용하거나 가정법의 시제가 몇 글자 차이로 틀리면 내용이 반대가 되어버린다 - 하면 9점 밑으로 내려가고, 여기에서 1점만 더 내려가면 과락기준에서 달랑달랑하게 된다.
두 번째 레이어는 출제자에 의도에 대해서 과하지 않도록 적절히 반박하는 걸 깔아야 한다. 내가 당신 이 문제 왜 냈는지 아는데, 그러니 여태 당신이 이 모양이지... 혹은 10년 전에 이런 식의 문제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이런 문제나 내고 있느냐... 이건 기술적으로 세밀하고, 예의가 필요한 작업이다. 만약 택도 아닌 방식으로 출제자의 의도를 공격했다면, 이젠 8점이 아니라 0점도 각오해야 한다. 기술적인 시험이었는데, 이걸 잘못 처리해서 4점을 받고 결국 재시험을 보게 된 경우가 있었다. 이 때내가 주로 했던 주의사항은 첫번째 레이어에서 기술적으로 출제자의 의도에 대한 공격이 연결되도록 논리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분량이 과하면 안되고, 또 절대로 출제자가 자신을 직접 공격한다고 느끼도록 하면 안된다. 어쨌든... 채점자는 출제자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도전적인 자세인데, 이 두번째 레이어를 통해서 문제는 물론 내가 쓴 답이 과연 학계에서 어떤 자리에서 어떤 흐름에 있다는 것인지를 내가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프랑스에서 대학원 이상의 시험에서는 단순하게 기술적인 지식을 묻는 것만은 아니고, 기술을 전수하는 마에스트로와 전수받는 사람 사이의 일종의 대화에 가깝다. 이 두 번째 레이어는 첫 번째 레이어의 중간중간에 아주 가볍게 감춰둬야 하지만, 물론 아무리 감춰도 전공자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안다. 결국 자기 욕인데, 숨겨놓았다고 그게 숨겨지겠는가. 애교로 도망갈 수는 없고, 만약 정확하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이 질문을 할 수 없다면 두 번째 레이어는 포기하고, 그냥 10점을 기대하는 것이 좋다. ENSEE에서 봤던 시험에서 워낙 문제가 어려워서 아예 이 두 번째 레이어는 포기하고, 그냥 첫 번째 레이어만 가지고 답을 쓴 적이 있다. 운이 좋게 12점이 나왔는데, 그 과목에서 매우 화려한 등수를 얻었던 적이 있다.
세 번째 레이어는 아주 어렵다. 왜 내가 지금 시험을 보고 있느냐, 그리고 왜 당신은 이 문제를 내고 있고, 우리는 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지금 한 학기 동안 수업 혹은 세미나라는 공간에서 마주보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 세상을 살고 싶다... 이런 학자로서의 결심 혹은 앞으로 연구하고 싶은 분야 같은 것을 문제의 행간에 대한 약간의 비판들과 함께 살짝 밀어넣는 것이 15점을 넘어가는 기록적인 점수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세 번째 레이어이다.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것까지는 필요가 없지만, 내가 쓴 불어에는 수많은 철자오류와 문법오류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불어로 쓰니까 이렇지라고 - 사실 우리말로 써도 오히려 그 이상의 오탈자와 문법오류가 나온다 - , 하여간 뭔가가 더 필요하다. 한문장, 길면 두 문장 같은 것들을 예를 들면 장-밥티스트 세이의 업적에 평가하면서, 가정법 혹은 조건문 같은 것을 동원하고, 주어도 'on'과 같은 비지칭 주어를 사용하거나 수동형 같은 것을 활용해서 살짝 끼워넣던 것이 내가 주로 쓰던 수법이다. 선생을 단순히 감동시키는 것만으로는 15점을 넘어서거나 혹은 이 오류 투성이의 불어문서를 과락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하고, 같이 연구하는 동료라는 생각에서 약간의 뭔가가 더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몇 번 17점과 18점을 넘긴 적이 있었는데, 내가 15점을 넘겼던 모든 시험들은 예외없이 이렇게 세 개의 레이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답안을 쓰고 나면 학기가 끝나고도 나중에 선생이 따로 부르거나 혹은 곤경한 일이 처했을 때에 자상하게 도움을 받게 된다... 나도 몇 번 그 시절의 답안지 덕분에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고, 대학원 입학할 때까지의 고생과는 달리 마지막 학위를 내는 순간까지 정말이지 편하게 지냈고, 약간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 지냈다.
그 시절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인지, 대체적으로 세 개의 레이어로 글을 구성하려는 경향이 나에게는 있다. 그래서 내가 혼자 보면서 흐믓해 하는 몇 개의 글들은 이렇게 세 개의 레이어를 구성하는데 성공한 글이다.
나중에는 정주영 회장한테 올라가는 보고서나 총리한테 가는 보고서도 이렇게 세 개의 레이어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 때때로 잘 썼다는 소리를 듣고, 때때로 도대체 그 말은 왜 넣었냐고 드럽게 터지기도 하고... 세상은 학기말고사와 같은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이 전략은 한국에서 그렇게 유효하지는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내 판단이다. 일단 우리말이 불어와 같이 은근한 조건법이나 부대상황 같은 것들을 숨겨서 표현하는데 그렇게 간단치가 않고 - 그렇다고 내가 우리말보다 불어를 더 잘한다는 것은 아니다 - 또 수동형 같은 것으로 교묘하게 능동과 수동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우리 말 표현에서는 어쩐지 어색하다.
쓸데없는 얘기가 괜히 길어졌다. BBC에는 Royal Charter라는 것이 있다. NHK는 공영방송으로 왜 좋은 방송이 되었는지는 2주 동안 좀 들여다봤는데 아직도 전혀 이해를 못했고, BBC의 경우는 Royal Charter라는 존재와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점에서는 약간의 프레임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Royal Charter를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방송국이 여왕과 한 약속인 셈인데, 왕립, 고귀, 황제 - 이러다 황송까지 나오겠다 - 그 어떤 수식어도 이 맥락에서는 잘 안 맞는 것 같고, Charter도 늘상 하듯이 장전이라고 해서는 뚯이 안통할 것 같다. 황실 장전? 무슨 AK 탄창튀어나오는 소리 같다. <경제 비타민> 같은 것 좀 하지 말라는 한 문장을 원고지 여덟장으로 늘리는 일이 막상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데, 정말로 이걸 사라지게 하는 사회적 행위 혹은 유사한 사건이 벌어질수 있도록 주어진 원고지 여덟장에 말하는 방법은? 그냥 안 없애면 총들고 쳐들어간다는 단 하나의 문장이 복잡하지 않고, 간결해서 좋은데, 이런 문장은 우아하지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원고지 여덟장을 어쩌면 그렇게 우아하게 잘 메꾸는지, 이럴 때는 부럽기도 하다.
# by | 2007/07/31 04:41 | 그냥 잡담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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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문장론으로 엮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