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집 제목은...

출판사에서 칼럼집 제목을 생각해보자고 한다.

글을 고르는 과정에 나는 거의 손을 댄 게 없어서 제목도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갑자기 머리가 탁 막혀서 난감하게 되었다. 칼럼집은 주제가 하나로 모이지 않고, 이 경우에도 서로 다른 주제를 4개의 장으로 구분한 셈이라서 주제나 문제의식이 모아지지는 않는다. 특별하게 머리에서 떠오르는 제목은 여전히 없다.

그래서 생각 끝에 내 옛날 별명을 가지고 장난을 쳐볼까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광야에 외치는 사나이'... 이건 서울대 철학과의 김상환 선배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주경철 선배나 불문학 하던 선배들, 이런 양반들 사이에서 이런 별명으로 통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시절에 비하면 난 요즘 직접 만나면 거의 '실어증'에 가까울 정도로 입이 무거워졌고, 어지간하면 얘기를 잘 안한다. 좀 웃기는 얘기이기는 하지만, 공무원들 사이에서 나는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통한다. 그야말로 '발설'을 잘 안하기 때문이다. 한 때의 별명이었지만, 여전히 나는 이 별명이 가지고 있는 한 긍정적 속성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본다. 노무현 초기, 뭔가 잘못되었다고 제일 처음 외쳤던 사람이기도 하고, 제일 강도 높게 새만금에서 시작해서 FTA 문제까지 외치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광야에 외치는 사나이 같은 40대틱한 제목으로 책을 팔아먹을 수는 없고, 무엇보다도 이런 제목을 칼럼집에 달아서는 사람들에게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일리가 없다. 이런 건 누군가 그냥 놀리기 위해서 별명으로 부를 수 있는 말이지, 자신의 글에 직접 다는 제목이 아니다. 정말로 이런 제목을 단다면, 제 정신이 아니거나...

"우박치는 밤..."이라는 제목도 잠깐 생각이 났다. 부장, 팀장, 전문위원, 의장 등등 몇 가지 호칭들이 있기는 했지만, 한 때는 너무 많은 직위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어서, 그리고 결국 대부분이 사람이 귀착하는 교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나서... 왜 그 때 교수가 안 되었느냐고 사람들이 종종 묻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교수가 되는 길을 접고 나서 비로서 행복을 찾은 경우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우박'이라고 불렀는데, '우박치는 밤'이라는 표현은 청와대 쪽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밤에 술 자리에 나타나서 잔소리를 잔뜩하고 가버리니, 후배들이 어제는 우박에게 된통 당했다는 말을 하면서 "어제는 우박치는 밤"이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무서웠다...

약간의 중의법이 재밌기는 하는데, 이것도 제목으로는 정신 나간 사람의 제목이다. 누군가 보면, 오, 그러셔? 박사라서 좋으셔? 요런 비꼼의 대상이 되기 딱 좋은 제목이다. 얼굴없고, 평범하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삶을 추구하는 내 정신에는 이제 맞지 않는다. 재밌기는 하지만, 숨어사는 삶에는 해로운 제목이다.

책 제목은 주로 아내가 많이 만들어줬는데 <아픈 아이들의 세대>가 아내 작품이였다. <음식국부론>은 발상은 내가 해냈지만, 아내가 느낌이 괜찮다고 해서 결국 그게 제목이 되었다.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는 나도 아내도 만족하지 못했던 제목이었다. 원래 작업할 때의 제목은 <미국행 노무현 호를 멈춰라>였었는데, 책 중간에 나왔던 '폭주'라는 개념을 가지고 출판사에서 만든 제목이었다. 이 폭주는... 철학적 정의를 내려볼려고 약간 시도를 했었는데, 딱 여기에 적절한 context를 찾지는 못해서 결국 <에반게리온> 초호기에서 가지고 왔다.

초호기는 전기로 움직이는 걸로 설정이 되어있었는데, 전기밥솥처럼 콘센트를 꼽아놓고 움직였던 초호기는 정말 웃겼다. 너무 설쳐서 코드가 빠지면 자체 동력으로 2분도 채 못 움직이는 로보트 전사라니... 그러나 이 초호기가 어느 순간 플러그를 뽑아버리고, 사도의 머리통을 깨물어먹는 장면에서, "초호기가 폭주했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플러그를 뽑고 달려나가는 것이 폭주다... (이 설명은 책에 넣었다가 길가다 린치 당할까 무서워서 결국 뺐다.)

<88만원 세대>는 승자독식 세대, 베틀로얄 제네레이션 등 상당히 오래 헤매다가 결국 박권일이 돌파구를 찾았던 경우이다. <88만원 세대> 다음 책인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는 삼 주 동안 제목을 못잡고, 다른 모든 작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목 때문에 표지인쇄로 못들어가는 상황에서 개마고원의 장의덕 사장이 생각한 제목이다. 물론 제목이 직설법에 가까와서 문학적인 감성에 탁탁 걸리기는 하지만...

광야에 외치는 사나이, 우박치는 밤, 이런 것들은 감성에는 잘 맞는데, 현실에 안 맞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름 이 분야에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에게 조언해준 말은, 그 양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진중권틱 하단다. 평소에 내 모습이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수줍게 앉아 있는 새색시 - 혹은 꿔다놓은 보리자루 - 같은 느낌을 살려보라고 한다... 그런 걸 제대로 할 줄 알면 나도 벌써 시인이 되었다.

하여간 필름 작업까지 거의 끝나고 제목만 달고 나가면 되는데,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는 이 칼럼집의 수줍으면서도 약간은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느낌이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by 비나리 | 2007/07/28 14:52 | 출간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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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 at 2007/07/28 15:55
외모가 맘에 안 드신다고 하셔서 샘 외모가 어떨까 꽤 기대를^^; 했었습니다.

(누군들 자기 외모 맘에 들겠습니까?
님 말씀처럼 손석희나 케네디가 아닌 이상...

손석희씨도 기자초년 시절 그니까 새파란^^ 젊은이였을 때
너무 얌전하게 생긴 자기 얼굴이 맘에 안든다고 했던 기억이.)

일전에 샘.. 티비 토론에 나오셨죠.
생각보다 멀쩡하셔서^^;;; 실망했다는.
갈색 안경테에 편한 재킷에... 분위기가 괜찮으시던데요.
책에 저자 얼굴이 잘 안 올라오더군요, 요즘은.
인터넷에 돌아 다니는 샘 사진들은 어떻게 좀..
갈색 안경 쓴 최근 이미지는 책에 넣으면 좋을것 같기도.

각설하고
칼럼집 기다려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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