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나, 특A급 영화

<시리아나>는 희한한 영화이다. 보통 나는 영화를 잡으면 어지간하면 한 번에 다 보는데, 이 영화는, 물경 5일이나 걸렸다. 이런 적은 없었다. 나중에 신 숫자를 한 번 세어볼까 싶은데, 보통 영화보다 신이 짧고, 파편처럼 이어진다. 4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토마호크 - 아마 토마호크일 것 같다 - 신과 '올해의 오일 맨 시상식', 두 장면을 향해서 달려나간다.

절제미라면 엄청난 절제미를 가진 영화이고, 생각이라면 엄청난 생각을 요하는 영화이다. 다큐멘타라리면 재미없는 다큐멘타리이지만, 진실의 보고서라면 이 영화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영화이다.

토마호크신은 사건을 지휘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데, 아주 짧게 "빵"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짧고 간결한 폭발음이 매우 짧게, 그리고 계속 정적이었던 것처럼 그 후로도 정적이 이어진다. 마치 귓가에서 폭탄이 터져서 귀청이 순간적으로 멍멍해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짧은 순간에 나는 눈물이 팍 터져나올 뻔했다. 정말로 이 사건이 잘 해결되기를 바랬었는데, 설마 토마호크였었을까? 정말로 이 짧은 순간에 눈물아 팍 터져나올 뻔했던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진실을 감당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카자흐스탄,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이런 단어들과 관련된 국제 자원시장과 선물 시장 혹은 백금, 텅스텐 같은 것은 것에 대해서 처음 공부를 시작했던 것은 정확히 17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국제적으로도 에너지맨으로 약간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young reformist chairs 중의 한 명이었다. 서른 다섯에 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이 되었는데, 딱 두 번, UN 회의에서 가장 막후에서 진행되는 고위급 조정회의에 들어가본 적이 있었다. 잊기 어려운 진한 기억이다.

영화를 보면서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의 기억이 났다. 다른 회의 때문에 그곳에 간 나는 4일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 그 전 주에 필리핀의 마닐라와 세부에 있었기 때문에 연거푸 동남아에 와야하는 일정 때문에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 게다가 외교부 고위관리와 같은 회의에 참석했었어야 했는데, 나와 그렇게 좋은 인연은 아니었던 사람이었다. 이래저래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었지만, 나와 만나기 위해서 굉장히 여러 그룹들이 내 호텔 주위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었고, 대부분의 대화는 승용차 안에서 짧게짧게 이루어졌었다. 그 시절에 나를 수행했던 사람은 스탠포드 출신의 엔지니어였는데, 그들에게는 달러가 너무 필요했고, 나는 그 달러가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약간의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큰 돈도 아니었던 기억인데, 과연 60년대 우리나라에 세계은행에서 차관이 들어왔을 때, 그 시절에 한국이 어떻게 움직였을지에 대해서, 마치 지나온 나의 나라의 옛 기억을 회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리아나는 그 시절의 기억과 함께 최근에 내가 목격한 몇 가지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 회상하게 해주었다.

(...)

에너지라는 곳이 원래 그렇다. 이제 현업에서 손을 뗀지 4년이나 되는데도, 가끔 나에게 판단을 요청하는 아주 골 아픈 사건들이 좀 있다.

석유, 가스, 이런 것들의 돈 단위가 워낙 크고, 골치 아픈 이권들과 잘 판단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랫동안 봤던 사람들 아니면 잘 판단하기 어려운 일들도 가끔 있다.

영화 <시리아나>는 그런 세계에 관한 일들인데, 아마 변호사라면 이 사건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을 것 같고, 경제학자라면 역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것 같다. 영화에서 언뜻 언급한 것처럼 회계사가 보았다면 또 각도가 다를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정보원의 눈으로 본 특정 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디자인되어 있는데 - 그러나 영화의 전개속도는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내용의 특징을 반영한 것인지, 대단히 느리다. 오락성은 철저히 배제하고, 다만 진실만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면 이런 양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진실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전혀 없는 영화, 진실은 다 두 문장 혹은 한 문단 내외로 요약되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소위 B급 영화에는 그래도 몇 줄의 진실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담는 진실은 분량은 적어도 때때로 너무 위험한 것들이라서 <레지던트 이블>의 경우처럼 좀비영화 혹은 공포영화처럼 치장하거나, <오스틴 파워> 시리즈처럼 저질 코메티 영화처럼 위장한다.

A급 영화에는 대부분 아무 진실이 없다. 감동이 있을 수도 있고, 재미가 있을 수도 있고, 아주 드물게 예술이 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아무런 진실이 없고,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기능을 가진 영화들을 A급 영화라고 부른다.

<시리아나>의 경우는 진실만으로 만들어진, 특A급 영화인 셈이다. 이 영화에는 과장이나 감정 같은 것들은 전혀 없다.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영화는 특정 사건의 특정 회사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모호하게 사건을 설정해놓은 셈이지만, 영화의 메시지만큼은 진실이다. 놀랍다. 요즘 헐리우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억지로 끼워넣은 멜로 라인도 <시리아나>에는 없고, 과장된 연기로 영화를 보호하려던 <로드 어브 워>에서의 코믹 터치도 없다.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부담스럽다. 원래 진실은 그런 속성이 있나보다. 잘 전달되지 않고, 잘 몰입되지 않는... 그러나 아주 작게 눈물 한 방울을 만들어내는 그 힘이 어쩌면 진실의 힘이 아닐까...

간만에 보는 특A급 영화다. (내가 태어나서 쿠테타가 성공하기를 기원했던 첫 경험을 주기도 했다. 페르시아 왕자의 슬픈 쿠테타, 너무 마음이 아팠다.)

by 비나리 | 2007/07/28 03:38 | 영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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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붤뤠 at 2007/07/28 08:30
진실은 불편하다고, 고어 형뉨이... 예전에 트래픽 볼때도 상당히 진도 안나가 던게 아마도 그래서 였던 것 같다는...
Commented by Samuel at 2007/07/28 11:43
어... 그거 토마호크가 아니라 무인기입니다. 프레테터 혹은 글로벌 호크에 미사일을 붙여놓은 거죠. 그 성능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확인한 우리군이 어떻게해서든 수입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미사일통제체제를 핑계로 미국은 안 넘이고 있구요. ^^;;
Commented by LnP_pond at 2007/08/19 18:39
트랙백이 어떤건지 잘 모르고 눌렀어요 ^^;;;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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